눈높이가 한계다 (레4:1-35)
설교 요약
'부지중'의 죄, 눈높이의 한계
속죄제는 '부지중에 여호와의 금령을 하나라도 어기면'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 의식적인 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삶의 모든 순간에 해당됨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금령은 하늘의 하나님이 이 땅의 우리 삶을 보시기에 좋고 아름답게 여기시는 눈높이에서 정해진 길입니다. 따라서 이 법을 준행하는 것은 단순히 말씀 자체를 지키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눈높이와 우리의 눈높이를 일치시키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높이로 가는 길
우리의 눈높이가 땅에 고정되어 있을 때, 돈 걱정, 자식 걱정 등 현실적인 문제에 매몰되어 살아갑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우스운' 일이며, 결국 죄가 됩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겨 그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볼 때, 비로소 걱정의 수준이 달라집니다. 자식이 대학에 가는 것보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계신지가 더 중요한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눈높이의 변화는 우리 안의 세상적인 욕심, 즉 '납덩어리'들을 비워낼 때 가능합니다.
마음의 가난함과 천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말씀은 단순히 욕심이 없는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세상적인 것들로 마음을 채우지 않고 비워낼 때, 우리의 마음이 실제로 천국에 닿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것을 담고 있으면 무거워서 땅에 깔려 하늘에 닿을 수 없지만, 마음을 비우면 비로소 위로 떠올라 천국을 경험하게 됩니다.
십자가로 나를 죽이는 삶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눈높이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를 죽이는 삶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플러스'를 좋아하지 않고, 싫어하는 '마이너스' 상황을 밀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주어지는 상황에 대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판단하려는 마음을 죽여야 합니다. '나는 이 일이 좋은지 나쁜지 모르겠다'는 고백은 나의 판단력이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마음이 비워지고 세상적인 기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판단을 멈출 때 죄악에서 벗어난다
불평과 원망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세상적인 '플러스 기준'을 가지고 현실을 바라보기 때문에 생깁니다. 예를 들어, 자식이 좋은 대학에 가지 못했을 때 친척이나 이웃의 시선을 의식하며 창피해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눈높이에 도달하지 못한 죄악입니다. 이러한 판단의 기준을 죽이고 '이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나는 모르겠다'고 고백할 때, 우리는 죄악에서 벗어나 상황이 그대로 하늘나라로 바뀔 수 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눈높이를 높이면 행동과 결실이 나타납니다.
율법을 완전케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하심으로 오셨습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반드시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매일 자신을 죽여 가는 삶을 반복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 그 눈높이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성경 말씀을 이루어가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 됩니다. 땅에 발붙이고 사는 상태와 비교할 때, 훨씬 나은 상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본문 도입부
이 설교가 다루는 질문
- ❓'부지중'에 짓는 죄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나요?
- ❓하나님의 눈높이와 나의 눈높이가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이 단순히 돈이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요?
- ❓세상적인 '플러스 기준'을 버리는 것이 왜 중요한가요?
-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을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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