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죽이실 나를 미리 죽이기 (레 20:1~27)

📖 레 20:1~27시즌III_구약레위기-3

설교 요약

하나님이 토해내시는 '나'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시며 반드시 죽이셔야 하는 나의 모습을 스스로 찾아내어 미리 죽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죽이시면 심판과 멸망이지만, 내가 미리 죽이면 무한한 복락의 영생이 열립니다. 이는 마치 암 치료 약이 발명되었어도 먹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나의 죽음을 복용해야만, 하나님이 토해내실 수밖에 없는 나의 역겨운 모습을 미리 죽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진정한 살길입니다.

땅이 토해내지 않는 삶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주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 (레 20:22) 땅이 토해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규례와 법도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보실 때 느끼시는 역겨움을 의인화한 표현입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을 실시간으로 받아 말과 행동해야 하며, 문자로 기록된 규례와 법도는 이를 확인하는 청진기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계명과 율법의 취지에 어긋나는 말과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착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우리의 상태를 보시고 역겨워하실 수 있습니다.

배우자의 양심과 아들의 의무감

하나님께서 반드시 죽이셔야 하는 상태가 되는 이유는 배우자의 양심과 아들의 의무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배우자의 양심은 하나님만으로 기뻐하는 것이며, 아들의 의무감은 영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으로 기뻐하지 않고 세상에서 기쁨을 찾거나,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이 역겨워하시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역겨운 모습을 발견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스스로를 죽여야 합니다. 십자가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가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몰렉 숭배: 자녀에게서 기쁨을 찾는 역겨움

몰렉 숭배는 선민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하나님이 첫 번째로 꼽으시는 역겨운 모습입니다. 부모가 자녀의 성공과 형통을 통해 마음의 기쁨을 기대하는 것은 배우자의 양심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녀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말하는 것은 아들의 의무감을 등지는 것입니다. 이는 살아있는 어린 자녀를 시뻘겋게 달군 몰렉의 팔에 올려 태워 죽이는 것과 같은 역겨운 모습입니다. 자녀를 마주할 때마다 내게서 역겨움을 발견하고, 하나님이 아닌 자녀에게서 기쁨을 원하거나 스스로 판단하는 나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여야 합니다.

접신과 박수무당: 미래에 대한 관심의 실체

접신한 자와 박수무당을 따르는 것은 미래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켜 마음이 온통 미래를 향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미래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신 영역이며, 우리의 마음은 지금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함께 머물러야 합니다.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우리의 마음을 기다리는 것은 귀신이며, 이는 귀신을 접하는 것과 똑같은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나를 당신의 백성으로 품으실 수 없고 토해내실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관심을 발견했다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과 동일시함을 통해 반드시 미리 죽여야만 합니다.

부모 저주: 지금 상황에 대한 불만

부모를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된 상황들에 대한 반발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된 존재로서, 있게 된 상황과 환경들에 대해 불만과 불평을 가지고 거부하는 것이 부모를 저주함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지금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린 태도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를 잃은 채 지금 상황을 마주하는 태도를 반드시 죽여야 할 모습으로 규정하십니다. 감사를 잃은 나를 역겨워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일 수 있어야 합니다.

난잡한 성생활: 모든 대상과의 잘못된 관계

선과 경계가 허물어진 난잡하고 문란한 성생활은 우리가 살면서 상대하는 모든 대상과의 잘못된 태도를 총망라합니다. 돈 문제든, 사람이든, 어떤 것이든 그것을 상대할 때 하나님이 하늘에서 정하신 뜻대로 말과 행동이 나오지 않는다면 난잡한 성관계와 같습니다. 돈 문제에서 기쁨을 얻으려 하거나, 스스로 판단하고 말하는 것은 배우자의 양심과 아들의 의무감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어떤 대상을 마주하든 하나님이 하늘에서 이루신 뜻을 따라 말하고 행동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역겹게 여기셔서 반드시 죽이십니다. 마음이 이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해야만 합니다.

스스로 접신/박수무당: 미래를 이야기하는 자

스스로 접신하거나 박수무당이 되는 것은 선민에게 미래를 이야기하는 자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잘살 수 있다! 나아질 것이다!'와 같이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전을 제시하며 마음의 관심을 지금이 아닌 미래로 향하게 하는 모든 자들은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선민에게 있어서 지도자는 지금 마음을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로 끌고 올라가는 자들입니다. 십자가 죽음은 세상에 대한 죽음이며, 세상에 대해 죽어야만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세상에서 나은 미래를 이야기하는 자들은 귀신을 접한 자이고 박수무당입니다. 하나님을 접한 자라면 지금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일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기쁨은 미래에 있지 않고, 오직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함으로써 생기는 기쁨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역겨움입니다.

본문 도입부

<반드시 죽이실 나를 미리 죽이기>의 줄거리 :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아닙니다. 죽임을 당하느냐 내가 스스로 죽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선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반드시 죽이시는 상태가 있습니다. 너무나 역겨워서 당신의 소유하심으로부터 토해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시면서 반드시 죽이실 나의 모습을 내가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러한 나를 하나님이 죽이시기 전에 미리 죽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죽이셔서 죽으면 심판이고 멸망입니다. 내가 그런 나를 미리 죽이면 무한한 복락의 삶이 열리는 영생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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