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젖 뗀 후 엄마 품의 차이 (시편 131:1~3)
설교 요약
니버 기도문의 한계
라인홀드 니버의 '평안을 비는 기도문'은 아름답지만 십자가 복음의 관점에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첫째, 시선이 세상에 고정되어 변화시킬 수 없는 것과 있는 것을 구분하려 하지만, 십자가 복음 안에서는 세상에 대해 죽었기에 이러한 구분이 무의미합니다. 둘째, '나'라는 주체가 모든 것을 판단하고 변화시키려 하지만, 십자가에서 죽은 자는 삶의 주체가 내가 아닌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 죽을 때에 비로소 평안과 용기와 지혜가 생깁니다.
세상에 대한 죽음과 하나님과의 연합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전제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해야 할 과제를 가진 존재로서 세상을 바라보거나 담고 있을 입장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연합을 우선시하면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고, 그때에 진정한 평안이 주어집니다.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과 연합한 자에게는 할 수 있는 일도, 할 수 없는 일도 없습니다. 이루어지는 일의 가능성 여부는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여호와를 바란다'는 것의 의미
시편 131편 3절의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라는 구절은 평안을 풀어내는 열쇠입니다. '여호와를 바란다'는 것은 곧 세상을 등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발을 세상에 담고 있는 한 평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발을 담그는 것은 거대한 탁류에 빠진 것과 같아 짓눌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발을 뗀 상태가 본문 2절에서 말하는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된 상태입니다.
교만과 오만의 뿌리
1절의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라는 고백은 세상의 추세와 정반대입니다. 세상은 큰 꿈을 가지라고 하지만, 다윗은 큰일을 이루려 힘쓰지 않겠다고 합니다. 마음의 공백을 세상으로 채우려 할 때 교만해지고 눈이 오만해집니다. 교만은 내가 높아지려는 마음이고, 오만은 남을 깎아내리려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평안을 깨뜨립니다.
젖 뗀 아이의 평온
젖먹이 아기는 젖 때문에 보채지만, 젖 뗀 아기는 엄마 품 자체를 좋아합니다. 다윗이 말하는 젖은 세상의 가치(돈, 건강, 성공 등)이며, 젖 뗀 아기는 이제 젖이 아닌 엄마 품, 즉 여호와 하나님을 갈망하는 상태입니다. 세상에서 젖을 갈망했던 강도로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을 갈망할 때 진정한 평온이 찾아옵니다. 이 세상에서는 내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이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내 마음의 배를 채우실 수 있다는 믿음이 평온을 유지하게 합니다.
십자가 생활화와 위의 것
세상에서 교만하고 오만한 마음이 생겨 큰 일을 자랑하고 인정받기를 원할 때마다 성전의 번제단에서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는 유일한 방법이며, 우리에게는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육체의 할례와 같이 더 이상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 세상의 가치를 찾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위의 것을 찾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땅의 것을 지켜보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평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은 젖 뗀 아기로서 하나님 품에 안겨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 도입부
이 설교가 다루는 질문
- ❓십자가 복음에서 말하는 '세상에 대한 죽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나요?
- ❓니버의 기도문과 십자가 복음의 평안은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있나요?
- ❓'여호와를 바란다'는 것이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한다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
- ❓교만과 오만이 생기는 심리적 기제는 무엇이며,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 ❓젖 뗀 아기가 엄마 품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처럼, 하나님 품에서 평안을 누리는 삶은 어떤 모습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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