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 없다” 그러나 ‘하나님 있다’ (시편 61:1~8)
설교 요약
개그맨 심형래 씨의 유행어 '영구 없다'는 스스로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있다'는 모순에서 웃음을 자아냅니다. 시청자는 영구가 분명히 존재함을 알지만, 영구는 자신의 말을 통해 존재가 부정될 수 있다고 믿는 듯합니다. 이처럼 뻔히 보이는데도 말로만 없다고 외치면 없어지는 것으로 믿는 영구의 '굳건한 믿음'은 신앙의 핵심과 맞닿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신앙인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웃긴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이 바로 십자가 생활화의 본질입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나를 보는 사람들 앞에서 '영구 없다'라고 살아갈 때, 하늘에서는 '하나님 있다'라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전부이며,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보는 나는 '영구 없다'라고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윗의 '영구 없다' 고백
시편 61편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을 떠나 요단강 동편 마하나임으로 피난 갔을 때 지은 시로 추정됩니다. 왕위에 오른 지 30년이 지나 백성들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기울어지던 절박한 상황 속에서, 다윗은 '내 마음이 약해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땅 끝'은 심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마하나임을, '높은 바위'는 단순히 예루살렘 복귀가 아닌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몸은 피난했지만 마음의 평강이 깨어져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상태에서, 다윗은 육체적 피난을 넘어 마음을 하나님께로 피난시키고자 했습니다. 이는 곧 세상 사람들 보기에 바보가 되어 '다윗 없다'라고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피난 상황을 신하들이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라고 맹세하며 마음의 피난을 영원히 하겠다는 고백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영구 없다' 외침입니다.
마음의 피난처, 성소와 번제단
다윗의 맹세, 즉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는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신앙인들의 고백과 같습니다. 이는 몸은 현실에 있지만 마음을 성소로 보내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겠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피난은 곧 성소를 떠올리며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는 것입니다. 지금 내 몸이 처한 자리에 대해서는 **'영구 없다'**라는 상태가 되고, 내 마음은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음으로써 하나님께로 피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는 특별한 방법은 지성소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삶의 상황에 휩쓸려 약해져 있기에, 번제단에서 죽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이 세상 삶에 먹혀버린 내가 죽고, 아무것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마음으로 다시 태어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을 때, 우리의 마음은 몸이 처한 상황을 떠나 하나님께로 피난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있다'의 기업
다윗은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의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가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평생의 서원은 육체에 어떤 상황이 주어지든 **'영구 없다'**라고 외치고 마음이 하나님께로 피난 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라를 잘 다스리거나 전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이것을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이렇게 주의 이름을 경외하자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마음이 피난 가서 없어진 현장에 대해 **'하나님 있다'**라고 행동하시고 역사하셨습니다. 그것을 다윗은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의 평생 사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학교든 직장이든, 그곳에서 '영구 없다'를 외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는 것이 사명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나의 마음을 번제단에서 죽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을 때, 우리의 마음은 그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가 계신 하늘로 이끌려 갈 것입니다. 그럴 때 '영구 없다'라고 실천하는 현장에는 **'하나님 있다'**라는 응답이 내려오게 될 것입니다.
'나'의 죽음과 하나님의 주체성
우리의 사명은 어떤 곳이나 누구 앞에서든지 **'영구 없다'**라고 마음으로 외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십자가를 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음은 그 자리를 떠나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이 상황을 대면하는 내가 죽었음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기도할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하늘 아버지와 만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주체성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구 없다' 대신 '영구 있다'를 좋아합니다.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끌어안고 걱정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는 마치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 왕에게 반역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 몸이 처한 상황은 하나님이 통치해야 할 영역인데, 우리가 스스로 해결책을 제시하며 그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우리의 평생 사명은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라고 말한 다윗의 맹세와 같아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때에만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있다'의 응답
'주님과 함께 이 직장에 대해서 죽습니다. 이제 내 주체성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게 해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바로 하나님을 부르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사명으로 여기면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응답하실 것입니다. 영구 없는 그곳에 하나님이 계실 것입니다.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나의 주체성은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나님께로 피난가야만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주체성이 활성화되시고 그 활동의 결과로 이 땅에서 내게 허락하신 기업이 됩니다. '영구 없다'라고 하는 고백이 우리의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명 수행자들에게는 끊임없이 **'하나님 있다'**라는 응답이 들려질 것입니다. 이보다 남는 장사도 없으며 이보다 복된 삶도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로 '영구 없다'라고 하는 사명 수행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본문 도입부
이 설교가 다루는 질문
- ❓십자가 생활화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 ❓'영구 없다'는 태도를 실천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요?
- ❓마음을 하나님께로 피난시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 ❓번제단에서 '나'를 죽인다는 것은 현대 신앙생활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나요?
- ❓하나님의 주체성이 활성화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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