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이 절대로 불가능한 관계 (에스더 9:1~16)
설교 요약
공존 불가능한 관계의 본질
우리는 살면서 '공존이 절대로 불가능한 관계'를 경험합니다. 이는 마치 이혼을 결심한 부부가 서로를 다시는 돌아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참된 기독교인과 공산주의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공산주의자의 회심을 바라며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운명이지만, 두 이념 자체가 공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합니다.
에스더 시대의 명확한 대적
오늘 본문은 선민에게도 결코 공존할 수 없는 대상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유대인 말살 조서가 반포된 후,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멸절시키려 했던 대적들을 멸절시켰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는 구절이 세 번이나 반복된다는 점입니다. 이는 이 싸움이 이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서로를 지양하는 공존 불가능한 관계였음을 강조합니다.
오늘날의 공존 불가능한 대상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누구를 공존 불가능한 대적으로 여겨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여인, 세리, 창녀와도 공존의 가능성을 열어두셨습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 대제사장들에게는 '화 있을진저',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하시며 거부하셨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과 공존할 수 없는 자가 된 이유는 지옥으로 갈 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땅의 것을 추구하는 자들
예수님께서 독설을 퍼부으신 이유는 그들이 유일한 참된 기쁨이자 만족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독점하고도, 그 이름을 이용해 땅의 것을 획득하며 기뻐하고 만족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마음의 배를 땅에 붙이고 세상으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찾는 자들, 즉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교회 밖의 무지한 자들과 달리, 교회 안에 있는 이러한 자들은 공존이 불가능합니다.
선민 됨의 보존
공존하지 말아야 할 자들과 공존하는 동안 우리의 선민 됨과 구원은 지워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공존 불가능한 존재가 누구인지 명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붙잡았다면 마음은 하늘로 향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이 십자가인데, 십자가로 구원받았으니 이제 세상에서 무엇이든 구하겠다는 생각은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이러한 자들과는 더 이상 공존의 가능성을 열 수 없습니다.
경계와 분별
사도 바울은 공존 불가능한 자들을 깨달았기에, 공존할 수 있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에 대한 교제를 경계했습니다. 구역 예배 후 곧바로 세상 이야기를 하는 모임에는 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지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존 불가능한 존재에 대한 명확한 깨달음이 우리의 선민 됨을 지키는 길입니다.
본문 도입부
이 설교가 다루는 질문
- ❓오늘날 교회 안에서 '공존 불가능한 대상'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의미하는가?
-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는 것은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말하는가?
- ❓교회 안에서 '선민 됨'이 지워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 ❓공존 불가능한 자들과의 교제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십자가 생활화 복음의 핵심은 무엇이며,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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