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단위, 四位一體(?) (이사야 64:1~12)
설교 요약
단위의 정의는 혼선을 막고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1미터가 빛의 속도와 세슘 원자의 진동수로 정의되듯, 인간의 구원 역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명확한 정의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복음은 단순히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통해 비로소 인간이 되게 하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기준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서는 이 기준을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된 상태, 즉 사위일체라고 제시합니다. 이는 독립된 인격을 가진 인간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인간 기준: 삼위일체 참여
하나님께서 정하신 인간의 기준은 바로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요 17: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을 넘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서는 이러한 개념을 뒷받침하며, 하나님께서 선민을 "드시고 안으셨다" (사 63:9)는 표현을 통해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된 상태를 암시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보시는 인간의 본래 모습이며, 이 기준에서 벗어난 자들은 더 이상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합니다.
세상의 인간론과 하나님의 기준
세상에는 다윈의 진화론, 마르크스의 유물론, 프로이트의 성욕론 등 수많은 인간론이 존재합니다. 간디와 같은 위인조차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하지 못했기에 '불량인간'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범죄자나 되어야 불량인간으로 여기지만, 하나님의 기준은 훨씬 엄격합니다. 재벌, 석학, 위인이라 할지라도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하지 못했다면 하나님의 창조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신사임당조차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다를 수 있기에, 예수님을 아는 우리는 참 인간의 모습에 대해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 마음의 뒤틀림
하나님께 집중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는 마음이 뒤틀리고 구부러져 세상을 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아원'(עֲוֹ֨ן)은 '비틀다, 구부리다'라는 뜻으로,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피해서 세상을 마음에 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배우자, 자녀, 사업, 취미, 나라 등 무엇을 마음에 담든, 이는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마음에 나라를 담는다면 인간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십자가 생활화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며, 하나님 보시기에는 진멸의 대상일 뿐입니다.
인간 되기 위한 간구: 시온의 회복과 십자가 생활화
이사야는 폐기처분 대상에서 빠져나와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시온의 성전 복구를 간구합니다. 이는 상번제의 어린 양과 함께 죽음으로써, 즉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세상을 마음에 담는 것을 1초도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을 담았다고 느끼는 순간 십자가를 바라보고 죽음으로써, 마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께 집중하게 됩니다. 이 집중을 통해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하고 사위일체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철저할 때 삶은 거저 사는 것이 되며, 하나님이 계획하신 본래 인간의 모습이 될 때 삶은 거저 살아집니다.
가장 결연한 한 줄: 구원은 곧 하나님 기준에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도입부
이 설교가 다루는 질문
- ❓사위일체란 정확히 무엇이며, 삼위일체와 어떻게 다른가요?
- ❓하나님께서 보시는 '불량인간'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 ❓마음을 비틀어 세상을 담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요?
- ❓십자가 생활화는 어떻게 사위일체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나요?
- ❓세상적인 인간론과 하나님의 인간론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전문 읽기와 AI 질문은 앱에서 무료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13개 언어 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