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개 인생살이 대신 주최측이 된 사람 (창 18:16~33)
설교 요약
사냥꾼의 삶에서 주최측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마음의 만족과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 '사냥꾼'의 삶을 살아갑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마음은 늘 비어있기에 세상의 좋음을 쫓아 채우려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 세상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주권자 하나님과 함께 자유롭게 소통하는 '주최측'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생각과 가치 기준이 나의 것과 일치하는, 하늘의 언어 체계를 갖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례함과 집요함, 그 이유는?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앞에서 주권자 하나님께 마치 가르치듯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열 명까지 의인을 찾아달라며 집요하게 간구합니다. 이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향한 무례하고도 기이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태도를 모두 수용하십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자신이 티끌이나 재와 같은 존재임을 알면서도, 하나님과의 친함을 바탕으로 이러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친함'이란?
아브라함의 인생살이의 핵심은 주권자 하나님과의 무지한 친함에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동원하거나 이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땅에서의 삶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주권에 완전히 일임했습니다. 이는 하나님 이외에 이 땅에서는 좋은 것이 없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친할 때, 우리는 세상의 경품을 탐내는 직원과 같은 태도를 버리고 진정한 주최측이 될 수 있습니다.
의로움과 공도: 주최측의 삶
아브라함의 자손은 세상의 좋음을 통해 마음을 채우려는 사냥꾼이 아닙니다. 이 세상 것이 전혀 필요 없을 정도로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겠다는 결심을 유지할 때, 비로소 타인이 사냥감이 아닌 사람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은 나의 의로움을 통해 내려오고 정의로움으로 표현됩니다. 의로움은 하나님만을 좋아하며 하나님 마음에 드는 상태이고, 정의로움은 하나님만을 좋아하면서 사람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중보가 아닌 주최측의 입장
많은 이들이 본문을 중재나 중보 기도로 해석하지만, 이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소통이 아닌, 내 마음의 채움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특권을 이용하려는 상태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진정한 중재와 중보는 세상에 대한 사심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사람을 사람으로 볼 때 가능합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할 정도로 친한 사람만이 주권자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을 주최측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정의로움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버리면서도, 생면부지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집요함을 보였습니다. 이는 그가 사람을 사냥감이 아닌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타인을 통해 얻을 것이 있어서 위하는 마음이 아닌, 순수하게 사람으로 보일 때 진정한 위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러한 정의로움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며,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당신의 생각을 이루어 가시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을 유산으로 받는 자손들의 모습입니다.
본문 도입부
이 설교가 다루는 질문
- ❓아브라함은 왜 하나님께 그렇게 무례하게 말할 수 있었나요?
- ❓주최측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의 태도를 의미하나요?
- ❓하나님과의 '친함'은 세상의 것을 얻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요?
- ❓의로움과 정의로움은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실천될 수 있나요?
- ❓중보 기도와 주최측으로서의 입장은 어떻게 구분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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